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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공평한 어리석음]민주주의는 방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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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이 날짜25-06-04 22:41 조회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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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전은 늘 비장하거나 곤혹스러운 물건이었다. 어릴 적 한글사전은 세종대왕의 분투와 일제강점기 한글학회의 외로운 투쟁을 떠올리게 했다. 사전을 넘길 때마다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비장함이 있었다.
중학생 때 처음 받은 영어사전은 이름이 ‘콘사이스(Concise)’였지만 전혀 간략하지 않았다. 두툼한 사전을 잘근잘근 씹어먹듯 외워야 한다고 해서 몇번 입에 넣었지만 단어는 머리에 남지 않고 항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인물 하나가 사전에 대한 나의 감정을 조금 바꾸었다. 그는 새뮤얼 존슨. 18세기 영국의 문인이자, 최초로 본격적인 영어사전을 만든 사람이다. 당시엔 표준화된 영어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시대였던지라, 존슨은 혼자서 수십년 동안 수천개의 단어와 그 용례를 모아 책을 냈다. 어두운 골방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한 까닭에 그는 ‘무료함’을 정의할 때 “사전을 만드는 일”을 예로 들었다.
나는 그 순간 옥스퍼드대학의 답답한 도서관에서 가운을 입고 일하는 노학자가 떠올랐다. 환한 곳에서 편하게 밥 먹으면 될 터인데도, 굳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전등도 없는 곳에서 촛불을 켜고 라틴어로 한동안 흥얼거리다가 프랑스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투박한 치즈를 박사 논문 표지보다 큰 접시에 담아서 음미하는 학자들.
하지만 닥터 존슨은 남달랐다. 그의 사전은 활달하고 해학스럽고 화려하다. 용례로 등장하는 문헌도 역대급이다. 한마디로 ‘사심 가득한’ 사전이다. 단어 설명은 적확하거나 논리적이지 않을지 모르나, 마음을 때리거나 미소 짓게 한다. 사악한 직관이 넘친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귀리’를 “잉글랜드에서는 말에게 주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곡물”이라 정의했다. 유쾌한 한 줄이었지만, 스코틀랜드와 영국 전역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사실 여부를 따질 정도였다. ‘점심’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음식의 최대치”라고 했는데, 그의 손은 ‘어마무시하게’ 컸다. 그렇다면, ‘정치인’은? “계략과 술책에 능한 자”다.
의외도 있다. 풍자와 날카로운 조롱으로 가득한 사전에서 존슨이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방식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차분하다. 장난기를 싹 거두고 정색하며, 민주주의를 “국민 전체로부터 나오는 주권적 권력”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사실 당황했다. 이런 사뭇 비장한 주권을 ‘계략과 술책에 능한 자’에게 맡기는 것이 현실 정치라는 뜻인가. 존슨이 사전 속에서 눈을 부라리며, 민주주의에서 살아가는 당신은 안전벨트를 매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놀려대는 듯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의 이런 왈패질에는 용서하지 않고 마땅히 그 페이지를 찢어 집어삼켰겠으나, 내 나라에서 한바탕 불법계엄을 겪고 나니 차마 민망해서 그러질 못하겠다.
그러나 또 어쩌겠는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또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정치인을 집단적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과정이고, 민주주의의 복원력이란 이런저런 나쁜 정치인을 끊임없이 걸러내는 힘이다. 존슨은 선거를 “선택하는 행위”로, 투표를 “목소리를 내고 집계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목소리를 내고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인데, 결국 우리 몫이다.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은 이렇게 숙명적으로 고단하다.
존슨은 방귀에는 “뒤에서 나오는 바람”이라며 넉살을 부린 뒤 다소 문학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사랑은 방귀다. 내 속으로만 품고 있으면 내가 괴롭고, 그렇다고 해서 바깥으로 내보면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는다.” 민주주의도 방귀와 같아서 상처가 없을 수 없다. 그것도 우리가 선택하고 밀고 나가야 할 몫이다. 때로는 단호해야 한다. 모호한 사랑은 뺨 맞은 자국을 남기고, 애매한 민주주의는 그냥 허접하다.
내친김에 나도 투표라는 단어를 정의해 본다. 투표란,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너가는 조용한 발걸음, 하지만 기약도 안식도 없는 끝없는 잰걸음이다. 이 지랄 맞은 과정에서 웃으며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사전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단어가 다시 웃음을 허락할 때, 그때가 바로 민주주의가 복원되는 순간이다.
그나저나, 존슨의 재기발랄한 사전은 100년 장수를 누린 후 웹스터사전에 자리를 물려주었다. 웃음기 쫙 뺀 영어사전의 참혹함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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