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더러운 말과 부끄러운 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행복이이 날짜25-06-03 10:37 조회0회 댓글0건본문
지저분하다. 이대로 끝나면 2025년 대선은 최악의 말싸움뿐이었던 선거로 기억될 것으로 전망된다. 내란 재판이 진행 중이고, 신구 개헌론이 경합하고 있건만, 나라의 앞날에 대한 어떤 정책도 토론도 필요 없다는 듯이 후보 잡사에 대한 지저분한 말싸움만 나돈다. 더러운 말을 문제 삼거나 방어하는 그 말도 더럽다. 이렇게 정책도 전망도 없이 맹탕 말다툼으로 이어가는 선거는 또 처음이다.
왜 이리 저질인지 까닭을 생각해보자. 후보 수준 때문인가. 준비된 후보 또는 토론의 명수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과거 후보들에 비해 확실히 역량이 떨어지는 자들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아무리 김대중, 권영길이 다시 온다고 해도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여성 성기를 운운하는 발언에 평정심을 갖고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혹시 이미 굳어진 선거 구도를 엎으려면 막말 전략을 동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정치 기획 때문일까. 이 나라 정당정치는 어느덧 허약해진 나머지 주술적 기획을 동원하고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수준이 됐다. 급기야 내용도 없고 효과의 방향도 예측할 수 없는 더러운 설전을 벌여서라도 정치적 운명을 시험해야 한다는 무모한 기획이 주류 정치에 등장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인터넷 담론 문화가 주류 정치권에 흘러와 밑바닥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이유가 된다. 확실히 인터넷 토론공간을 기반으로 발전한 말하기 방식이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퍼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진정한 말하기, 가식 없이 말하기, 그리고 무엇에 대해서든 말하기가 새로운 말하기 규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고결한 척 애매하게 글 쓰는 수법은 신문 논설이나 평론에서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가식이어서 보기 좋았던 아나운서식 말하기는 이제 옛날식 화법으로 풍자 대상이 됐다.
막말이 난무하는 인터넷 공동체에서, 주류 언론 매체에선 접할 수 없던 장외 의제를 발견하고 놀란 이들이 있다. 익명의 공동체에 ‘눈팅으로나마’ 참여하면서 새로운 연대감을 경험했던 이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았던 그 엄청난 막말하기가 새로운 소통의 규범이 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다. 직장이나 교실은 물론 가족 모임이나 동호회에서 누구도 그 화법을 승인해주지 않는다.
정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언의 자유가 가장 폭넓게 보장되는 정치에서 바로 그 막말 문화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인터넷 동영상 채널을 매개로 이뤄지는 정치토론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술집이나 친구 집에서 끼리끼리 낄낄대며 교환했을 법한 수준의 대화를 수십만 구독자 앞에서 한다. 취재와 첩보를 섞고, 해석과 설명을 맞바꾸고, 음해와 음모를 분노와 조롱에 담아 나눈다. 단지 보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 화법은 정치적 토론의 새로운 기준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미 우리 사회 밑바닥에 자리 잡은 그 담론 양식을 없앨 수는 없다. 정치적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정에서 아무리 수준이 낮고 양식이 천하다고 해서 발언 자체를 규제할 도리도 없다. 다만 우리나라 정치인들 가운데 스스로 밑바닥을 드러내면서 인터넷 하위집단에서나 볼 수 있었던 소통의 방식을 퇴적물처럼 드러나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과제는 정치적 담론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적어도 냄새나는 퇴적물이라도 덮을 수준이 돼야 한다. 노무현, 노회찬 정도의 정치인이 다시 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 이를 이룰 수 없다. 시민 모두가 나누어 져야 할 일이다. 서로 논증과 비판을 장려하고, 풍자와 비난에 격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지위와 자격을 밑천으로 삼아 동료 시민을 능멸하는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말은 왜 부끄럽고 다른 말은 어째서 자랑스러운지 서로 가르쳐야 한다.
왜 이리 저질인지 까닭을 생각해보자. 후보 수준 때문인가. 준비된 후보 또는 토론의 명수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과거 후보들에 비해 확실히 역량이 떨어지는 자들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아무리 김대중, 권영길이 다시 온다고 해도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여성 성기를 운운하는 발언에 평정심을 갖고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혹시 이미 굳어진 선거 구도를 엎으려면 막말 전략을 동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정치 기획 때문일까. 이 나라 정당정치는 어느덧 허약해진 나머지 주술적 기획을 동원하고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수준이 됐다. 급기야 내용도 없고 효과의 방향도 예측할 수 없는 더러운 설전을 벌여서라도 정치적 운명을 시험해야 한다는 무모한 기획이 주류 정치에 등장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인터넷 담론 문화가 주류 정치권에 흘러와 밑바닥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이유가 된다. 확실히 인터넷 토론공간을 기반으로 발전한 말하기 방식이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퍼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진정한 말하기, 가식 없이 말하기, 그리고 무엇에 대해서든 말하기가 새로운 말하기 규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고결한 척 애매하게 글 쓰는 수법은 신문 논설이나 평론에서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가식이어서 보기 좋았던 아나운서식 말하기는 이제 옛날식 화법으로 풍자 대상이 됐다.
막말이 난무하는 인터넷 공동체에서, 주류 언론 매체에선 접할 수 없던 장외 의제를 발견하고 놀란 이들이 있다. 익명의 공동체에 ‘눈팅으로나마’ 참여하면서 새로운 연대감을 경험했던 이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았던 그 엄청난 막말하기가 새로운 소통의 규범이 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다. 직장이나 교실은 물론 가족 모임이나 동호회에서 누구도 그 화법을 승인해주지 않는다.
정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언의 자유가 가장 폭넓게 보장되는 정치에서 바로 그 막말 문화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인터넷 동영상 채널을 매개로 이뤄지는 정치토론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술집이나 친구 집에서 끼리끼리 낄낄대며 교환했을 법한 수준의 대화를 수십만 구독자 앞에서 한다. 취재와 첩보를 섞고, 해석과 설명을 맞바꾸고, 음해와 음모를 분노와 조롱에 담아 나눈다. 단지 보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 화법은 정치적 토론의 새로운 기준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미 우리 사회 밑바닥에 자리 잡은 그 담론 양식을 없앨 수는 없다. 정치적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정에서 아무리 수준이 낮고 양식이 천하다고 해서 발언 자체를 규제할 도리도 없다. 다만 우리나라 정치인들 가운데 스스로 밑바닥을 드러내면서 인터넷 하위집단에서나 볼 수 있었던 소통의 방식을 퇴적물처럼 드러나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과제는 정치적 담론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적어도 냄새나는 퇴적물이라도 덮을 수준이 돼야 한다. 노무현, 노회찬 정도의 정치인이 다시 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 이를 이룰 수 없다. 시민 모두가 나누어 져야 할 일이다. 서로 논증과 비판을 장려하고, 풍자와 비난에 격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지위와 자격을 밑천으로 삼아 동료 시민을 능멸하는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말은 왜 부끄럽고 다른 말은 어째서 자랑스러운지 서로 가르쳐야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